삼성가정의학과의원이상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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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는 사유의 끝판왕이다. 근대 철학자들이 고민하던 경험론과 합리론, 독단론을 극복한 거목이다. 비판철학을 수립한 그는 아예 사유 시대 구분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모든 생각은 칸트라는 큰 호수로 모여들고, 이후의 모든 사고는 칸트에서 근원된 물줄기’라는 표현이 그의 위치를 잘 대변한다. 사상계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반열에 있는 칸트는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

평생 독신으로 산 칸트는 1804년, 향년 80세로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만족이었다. 혼미 상태이던 그는 직전에 포도주가 섞인 물로 목을 축였다. 기력을 조금 회복한 뒤 세상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것으로 좋다’는 지나온 삶일 수도 있고, 직전에 마신 음료수였을 수도 있다. 철학자는 이승을 떠나면서도 모호한 말을 남겼다.

프로이센 태생인 그는 독일 관념 철학의 기반을 다지고,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다. 폭넓은 관점으로 현대철학과 과학에도 영향력을 미친 칸트는 이성의 구조와 한계를 연구한 순수이성 비판, 윤리학에 대해 고민한 실천이성 비판, 미학과 목적론 등을 탐구한 판단력 비판 등을 내놨다. 종교, 법, 역사에 관한 저술도 했고, 국가간의 분쟁 해결 방법으로 국제법에 따른 국제연맹을 생각했다.

근대 서구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칸트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프로이센의 왕도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 안장을 만드는 평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뿌리를 스코틀랜드라고 가르쳤다. 자신이 만든 제품의 브랜드도 스코틀랜드식으로 ‘cant’를 새겨넣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 중부 해안가에 살던 소수민족 쿠르스족이었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하대받던 출신임을 숨기기 위해 근엄한 조상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기억의 왜곡일 수도 있다. 칸트가 죽음에 앞서 한 말처럼 그의 뿌리, 즉 혈연에 대한 인식 또한 모호한 셈이다.

그는 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았다. 태어나고 자란 곳의 마을 언저리만 맴돌았을 뿐 다른 지역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 베를린대학의 교수를 제안받았어도 응하지 않았다. 마을을 떠나는 게 불편했을 것이다. 그는 마을에서 평생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가 일생 동안 거닐었던 고향 마을은 프로이센, 즉 독일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 땅이고, 이름도 칼라닌그라드로 바뀌었다. 2차대전 후에 패전국 독일은 이 지역을 러시아에게 넘겨야 했다. 이 또한 철학자가 생각지 못한 모호한 일이리라.

그는 움직이는 시계였다. 매일 오후 4시에는 어김없이 혼자 산책을 했다. 일정 시간에 일정 장소를 지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걸어가는 그를 통해 시간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계보다 정확한 그가 산책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게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프랑스대혁명 신문기사를 보다가, 또 한 번은 루소의 저서 에밀을 읽다가 놓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생체시계가 특정 사안에 몰입해 오작동된 것도 모호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전통 철학에서는 먹는 행위와 맛에 대한 성찰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칸트는 식사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복된 삶을 주위 사람과의 즐거운 식사로 규정했다. 식사 시간을 인간성과 지적 교류의 장으로 활용했다. 산책은 혼자 했으나 밥은 이웃과 같이 먹은 이유다. 그는 누군가와 점심을 먹으며 대화해야 했다.

한 번은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한 사람들이 오지 못했다. 이에 칸트는 도와주는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첫 번째 사람을 식사에 초대해 주세요. 주인이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의 일과표를 보면 식사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아침 5시에 일어나 홍차 2잔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7시부터 2시간은 강의, 9시부터 2시 45분 동안 집필, 13시부터 16시까지는 지인들과 식사를 한다. 16시에 산책, 저녁에 독서, 22시에 취침을 했다.

그는 하루에 점심 한 끼만 먹었다. 점심은 무려 3시간 동안 계속됐다. 즐기는 음식은 대구 치즈 버터였고, 식탁에는 늘 연한 붉은 포도주가 있었다. 칸트는 식사를 같이 하는 숫자에도 예민했다. 초대 손님을 2명에서 5명 사이로 한정했다. 불가피한 경우도 최대 참여 인원은 9명이 넘지 않았다.

이는 식사 시간을 지적 대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면 대화가 일방통행이 될 가능성이 있고, 사람이 많으면 집중에 어려움이 있다. 식사 대화의 순서도 불문율이 있었다. 만나면 가볍게 인사한 뒤, 거론된 주제를 토론했고,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일상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칸트는 152㎝의 작은 키에 몸무게도 50㎏에 불과했다. 어릴 때 영양실조로 인해 가슴과 오른쪽 어깨의 발달에 문제가 있었다.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세까지 장수했다. 이는 규칙적인 생활, 특히 식사를 오래 씹으면서 천천히 먹은 점과 계속된 산책 덕분으로 볼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도 컴퓨터나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다반사다. 식사중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소지가 있고 식사속도나 식사량을 조절하기 힘들어 비만에도 좋지않다.

건강 측면에서는 칸트처럼 규칙적인 운동과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식사를 하는 게 좋다. 특히 만성소화불량에 시달린다면 식사 때만이라도 핸드폰과 서류뭉치를 멀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글 : 삼성가정의학과의원 이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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