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정의학과의원이상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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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인에게 호찌민(胡志明 1890~1969년)은 어떤 의미일까. 베트남 곳곳에서는 호찌민의 초상화를 쉽게 볼 수 있다. 공항에서도, 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굴곡진 베트남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그는 이 나라의 국민 스타다.

물론 그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사람은 그를 ’독립의 아버지‘로 생각한다.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인식한다.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고, 정권을 잡은 뒤에도 검소한 삶을 산 그를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伯胡)'로 추억한다. 친근한 리더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베트남의 초대 주석인 호찌민은 평생 독신이었다. 그의 연인은 나라였고, 민족이었다. 호찌민이 국제무대와 베트남인에게 주목받은 계기는 1919년 베르사유 회의 때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이 회의에 출석한 호찌민은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했다.

이에 앞선 1918년에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인이 민족자결주의를 펼칠 수 있게 힘을 보태 달라는 청원서도 보냈다. 1921년 마르세유에서 개최된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는 인도차이나 대표로 참석했고, 1930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했다. 1941년에는 베트남에 잠입하여 베트남 독립 동맹회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 식민주의 세력을 몰아냈다. 또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20년(1955~1975년) 전쟁을 통해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했다. 다만 그는 1969년에 숨져서 통일의 순간은 보지 못했다.

호찌민은 1890년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찌민의 아버지 응우옌신삭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방관리였다. 그러나 프랑스 보호국으로 주권 없는 베트남 왕조의 관리 신분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인명사고와 관련해 면직되었고, 시골에서 훈장으로 살았다. 유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공손 하라는 의미로 아명을 응우옌신쿵(玩生恭)으로 지었고, 10살이 되자 성공을 바라는 의미인 응우옌땃따잉(玩必成)으로 이름 지었다.

아버지는 서당에 다니던 아들을 베트남의 프랑스 학교에 보낸데 이어 아예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찾는다. 돈이 부족한 호찌민은 프랑스 증기선의 주방 보조로 승선했다. 21살 청년이 된 호찌민은 국제여객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조리사가 되어 프랑스 땅을 밟았다.

그는 이곳에서 프랑스인의 인간존중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게 된다. 프랑스인과 식민지 베트남인에게 행하는 행동이 다름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어느 순간 개인적인 성공이 아닌 민족의 해방 투사로서 삶을 살게 된다. 호찌민은 정치인, 독립운동가로서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이끌었다. 그의 조직관리 능력은 젊은 날 요리를 한 과정에서 얻어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호찌민은 프랑스 요리의 대가인 에스코피에의 제자였다. 수습 요리사인 호찌민은 호텔 주방에서 설거지를 주로 했다. 연회가 끝나면 식탁을 정리했다. 먹다 남은 음식을 수거해 버렸다. 그러나 깨끗한 접시의 음식은 버리지 않고 주방으로 가져갔다.

이를 본 에스코피에가 이유를 물었다. 호찌민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버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깊이 감명받은 에스코피에는 동양에서 온 햇병아리에게 자신의 요리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케이크, 디저트 만드는 법에 이어 셰프의 비장의 무기인 소스 만드는 법도 알려줬다. 세계적 셰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에스코피에는 주방의 조직과 서열을 아주 중시했다. 주방 조직을 군사 조직처럼 상하의 권한과 책임, 의무 등의 일사불란한 체계로 만들었다. 호찌민이 만든 조직도 세밀했다. 그는 전쟁이나 게릴라전 때 군사의 조직부터 운용까지 치밀하게 관리했다.

에스코피에로부터 음식솜씨를 인정받을 정도의 수준에 이른 호찌민은 미국 알제리 콩고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 과정에서 정원사, 공장 근로자,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 (火夫) 등으로 일했다. 또한 보스턴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 제빵사, 런던 칼튼호텔에서 요리사로도 일했다.

그가 베트남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검소한 생활에도 있다. 국가최고권력자가 되었으나 의복이 화려하지 않았고, 집무실에는 고가품도 없었다. 식탁은 더욱 소박했다. 1일 3식에 3찬이 었다. 3찬은 육류나 생선, 채소, 국이었다. 그나마 음식이 남으면 버리지 않고, 다음 식사 때 데워 먹곤 했다. 주위에서 왜 3찬 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한 명이 더 죽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한 반찬은 돼지고기 장조림과 가자미였고, 후식으로 사과구이를 즐겼다. 또 출장 때는 도시락 식사를 많이 했다. 주먹밥 마른반찬, 국이 있는 정도였다. 외국 귀빈과도 종종 도시락을 들기도 했다.

음식 낭비를 극도로 안타까워한 그는 요리사에게 늘 적정한 양의 음식만 만들도록 했다. 외국사절이나 국가 주요인물을 위한 연회 때도 종종 주방을 찾아 “모자라도 안되지만 낭비해서는 더욱 안된다”며 세심하게 말할 정도였다. 이는 국민이 배고플 것을 걱정한 행동이기도 했다.

소식을 하는 그는 식사 시간도 규칙적이었다, 별다른 일정이 없는 한 아침 6시, 점심 10시 30분에, 저녁 5시 30분 무렵에 식탁에 앉았다. 식후에는 인삼차와 밀크 등을 마셨다. 그런데 늘 바쁜 생활을 한 탓인지 호찌민은 식사를 매우 빠르게 했다. 이 같은 식습관은 그의 셰프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서민적 이지미의 호찌민은 식탁에서도 국민과 눈높이를 같이했다. 그가 베트남 국부로 추앙받는 또 다른 이유다. 일반적으로 소식이 대식보다는 건강한 삶에 유리한 편이다. 비만도 문제가 되지만 건강한 소식에도 전제조건이 있다.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 섭취가 충분해야 한다.

그렇기에 반찬의 단순화는 권장할 사항은 아니다. 여러 음식을 골고루 섭취할 때 인체에 필요한 여러 영양분을 충분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호찌민의 담당 요리사와 의사들은 그의 적은 식사량을 걱정했다.

(글 : 삼성가정의학과의원 이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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