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막의 스타, 오드리 헵번.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여배우로 인식된다. 1953년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 앤 공주로 열연한 그녀는 단숨에 영화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상대역은 세기의 미남인 그레고리 펙이다. 18세인 앤 공주 역의 오드리 헵번은 신문기자 그레고리 펙과 동화 같은 사랑으로 팬들을 매료시켰다.
우아함과 고귀함 그리고 발랄함에서 천진난만한 청순미까지 여성의 매력을 모두 선보였다. ‘영화를 본 남자라면 그녀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평론까지 얻을 정도였다. 그녀는 사브리나(1954년), 파계(1959년) 아이의 시간(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등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또 전쟁과 평화, 백만 달러의 사랑, 어두워질 때까지 등에서도 팬들을 흠뻑 적시는 매력을 발산했다.
제26회 미국 아카데미상 여우 주연상도 받은 그녀는 1989년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 영혼은 그대 곁에(Always)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는 "모든 여성은 오드리 헵번의 외모를 꿈꿀 것"이라고 했다.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는 일반인은 물론 예술가들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식됐다. 2004년 에비앙은 세계적 명성의 패션전문지 편집인, 미용사, 사진작가 등 100명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미인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1위는 오드리 헵번이었다.
많은 영화에서 청순함으로 세태에 찌든 남자의 영혼을 위로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외모와 연기력이 다가 아니었다. 외면 못지않게 내면이 더 예술적인 아름다운 배우였다.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의 배역 논의 때 남자 주연 리처드 드레이퓨스가 천사 연기자를 궁금해했다. 감독 스필버그는 당연하다는 듯 오드리 헵번을 말했고, 드레이퓨스는 "그녀 외에 누가 천사역을 할 것인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은퇴 무렵부터 그녀의 삶은 천사와 같았다. 그녀가 좋아한 시어(詩語) 같은 아름다운 생활을 했다. 1988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그녀는 배고픈 아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중남미 아시아 등의 오지를 찾았다. 1992년에는 암이 발병했음에도 소말리아로 달려갔다. 1993년 63세로 숨지기 직전까지 5년여 동안 보여준 그녀의 박애주의는 긍정의 영향력을 곳곳에 뿌렸다.
그녀는 사재(私財)를 털어 어린이들의 허기를 채워줬다. 그녀의 선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동참의 손길이 계속됐다. 유니세프는 친선대사로 위촉했다. 그녀의 수락 조건은 1년 보수 1달러에 교통비와 숙박비 지원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두 거절했다. 그녀가 숨진 뒤 유엔과 ‘세계 평화를 향한 비전’은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오드리 헵번은 은퇴 무렵에 생각에 잠기곤 했다. 또 이런 말을 했다.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열대지방의 척박한 환경에서 영양실조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한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죽음도 순리로 받아들였다. 말기인 대장암을 치료하던 의사가 “최선을 다했지만 암 세포가 이미 많은 부위에 전이된 상태여서”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그녀는 "선생님,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것이 제 운명이니까요“라고 초연한 듯 말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세기의 여인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영국 은행가인 아버지가 당시 브뤼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는 곧 이혼했고, 그녀는 네덜란드 귀족 출신인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발레리나 수업을 받고 있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비교적 안전한 네덜란드로 갔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그녀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몸무게가 39㎏까지 빠졌다. 배고픔으로 인한 죽을 고비로 몇 차례 넘겼다. 한 번은 아사 직전에서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으로 생명을 건졌다. 국제구호기금(유니세프의 전신)의 도움도 받았다.
한참 성장기인 10대를 영양실조 상태로 보낸 그녀는 후유증으로 깡마른 몸과 그윽한 다크써클을 갖게 된다. 그런데 글래머가 대세이던 당시 영화계에서 호리호리한 가냘픈 체형과 깊은 다크서클은 그녀의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배우인 오드리 헵번은 균형 잡힌 식사를 즐겼다. 몸매 유지를 위해 자신만의 식단 관리와 운동을 생활화했다. 그의 식단은 영양소가 고르게 배치된 음식으로 구성됐다. 눈에 띄는 것은 감자를 주식처럼 먹었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한 점이다. 고기는 건강에 필요한 양만 먹었다. 특히 물을 많이 마셨다. 그녀는 아들 루카 도티에게도 ”건강을 위해 수분 충전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물병이 있었다.
물은 신진대사에 중요하고, 지방이 연소되는데에도 재료 역할을 한다. 비만뿐만 아니라 피부나 변비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 충분한 수분섭취는 여러 가지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달콤한 디저트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살찌는 것을 막기 위해 의식적으로 디저트는 삼갔다. 다만 초콜릿은 예외였다. 절제하되 종종 섭취했다. 어린 시절, 아사 직전에 생명을 얻은 추억 때문이지도 모른다. 이 같은 노력으로 오드리 헵번은 평생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
그녀의 식단은 건강한 삶과 날씬한 체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비만의 적은 기름진 음식의 다량 섭취, 당분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습관, 적은 운동, 야식 등이다. 오드리 헵번은 비만의 길은 모두 피했다. 대신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만드는 길을 걸었다. 이런 점에서 은막의 스타. 선행의 천사 오드리 헵번은 몸매 관리의 대모(大母)라고도 할 수 있다.
끝으로 오드리 헵번이 좋아했던 시어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면 좋겠다.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글 : 삼성가정의학과의원 이상훈 원장)
임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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